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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모든 것은 나로부터 끝나고 다시 시작한다.

by 아슈쿠림 2022. 10. 6.

일해서 피곤한 상태로 맞는 휴일 아침은 역시 반갑다. 어떠한 죄책감도 자기검열도 존재하지 않는 휴일 아침. 무슨 일을 해도 재미있고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느지막히 침대에서 일어난 일은 나를 재촉하기보다는 난 그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일을 시작한 후로 나에게 일어난 긍정적인 변화중 하나이다.

오전 10시. 식빵위에 올려 먹던 후무스가 다 떨어져 찬장을 뒤져보니 오래전 사두었던 땅콩잼이 한 통 있었다.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았군. 식빵을 구워 땅콩잼을 올리고 조금은 거뭇해진 바나나를 썰어서 올렸다. 시나몬가루를 뿌려볼까. 빵을 올린 접시를 들고 식탁에 앉았다. 투명한 가을 햇살이 쏟아지는 내 방에 바삭바삭 소리가 울렸다.
요즘은 독서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충동적으로 도서관에서 소설책 두권을 빌려 읽은 후, 내가 읽은 이야기가 사실이든 허구이든 따지지 않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은 이런 인생을 살았군 하는 생각이 제법 흥미롭게 느껴졌기 때문에 도서관을 재방문한 것이다. 책 한권한권이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한 인생같은 느낌이 들었다.

12시. 점심으로는 오랜만에 파스타를 해먹을까 해서 물을 올리고 냉장고에서 재료가 될 만한 것들을 꺼냈다. 제법 많은 채소가 모였다. 양파를 썰고 조금은 시들해진 버섯을 찢었다. 장볼때가 되었나. 최근에 산 칼이 잘 들어 맛있는 파스타가 되겠다 생각을 했다. 진한 월넛나무를 가공하여 만든 손잡이가 달린 인도네시아산 식칼은 제법 이국적인 느낌을 풍겨 내 요리시간에 그 특유의 감성을 더했다. 물이 끓자 다 먹으면 일인분이라는 누군가가 한 말이 생각나 링귀니를 한웅큼 쥐어 팔팔 끓는 물에 넣었다. 파스타면을 끓일 때는 바닷물이 되도록 소금을 넣어라는 누군가가 한 말도 생각나 그렇게 했다. 스테인리스팬에 모든 채소를 넣어 볶다가 토마토 소스를 붓고 뭉근히 끓였다. 면이 제법 익고나서는 약한 불에서 끓인 토마토 소스에 넣어 비비고 후추를 둘렀다. 내 방에는 가을 햇살로 가득 찼고 재료를 아낌없이 넣어 만든 파스타 한 접시와의 평화로운 점심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1시 40분 쯤. 갑자기 산이 생각난 건 그때였다. 이 집 베란다에 딸린 큼직한 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면 언제나 왼쪽에 있는 그 산. 미세먼지 하나 없는 화창한 날씨 때문인지 오늘따가 그 산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산의 테두리가 하늘과 선명한 색차이를 만들어 유독 산이 입체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오늘은 등산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흥미진진한 기분이 들었다. 집을 대충 치우고 필요한 소지품을 챙기고 500mL짜리 물도 두 통 챙겼다. 밖에서 본 구름은 심상치않게 아름다웠다. 지도를 확인하고 산 입구까지 가는 길을 파악했다.





2시 20분 쯤. 처음 가는 길이어서 한 블럭 갈 때마다 지도를 확인해야 했다. 그래도 처음 가보는 장소는 재미있다. 무엇이든 처음 하는 일은 흥미진진하다. 도시화가 된 지역을 지나 논밭사이로 난 길을 지나가야 했다. 들에서는 벼가 한창 익어가기 바빴고 축사에서는 뽀얀 털을 가진 소들이 여물을 먹고 있었다. 뭔지 모를 일을 열심히 하는 농부들,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캐는 사람들. 햇살은 사정없이 내리쬐지만 습기가 거의 없는 보송한 공기때문에 상하의 모두 긴 옷을 입어도 더운 줄 모르는 날씨. 문득 내가 가을이라는 계절을 이렇게나 많이 느껴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좌우로 드넓게 펼쳐진 들판에 어떤 것으로부터의 해방감도 느꼈던 것 같다. 드넓은 들판에 걸맞게 광대한 하늘과 거대한 구름 덩어리들. 약간은 압도 당했고 내가 작아지는 기분이었지만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크기에 속이 뻥 뚤리는 느낌도 동시에 들었다. 길게 뻗은 능선뒤에 숨은 구름도 시냇물에 비친 구름도 이쁜 날이었다.





3시 28분. 등산내내 거긴 어무도 없었다. 오랜만에 마스크를 벗고 밖을 걸어다녀서 그런지 조금은 어색했다. 내가 가야 할 길을 햇살이 비춰주고 있었다. 산에서 느끼는 자연은 인공적으로 만든 도시속 공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었고 질겼으며 강인했다. 몸통이 쩍 갈라져 고꾸라진 나무들은 정리해주는 이 없어 몇 십 년동안 저 상태에서 썩어가겠지. 아무렇게나 자란 이름모를 잡초들, 나뭇가지들, 노란 꽃, 보라 꽃 등등등. 산에 존재하는 모든 식물들은 살기위해 쭉쭉 커 있었고 외부인들에 의해 밟힌 자국은 그것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어떤 작은 곤충이 몇 차례 나를 들이받았고 땀을 흘릴 때마다 날파리들이 내 주위를 감쌌다. 그들은 나를 환영해주는 걸까, 아니면 나를 침입자로 여기는 걸까? 본능적인 그들의 행동은 나는 그저 입김 한번으로 제압해 버렸다. 그래도 포기할 줄 모르고 달려들어 나는 부지런히 손을 흔들어 그들을 쫓아야 했다. 끈질긴 녀석들.
올라가는 길에 맨들맨들한 도토리를 주웠다. 이정도는 내가 가져가도 되겠지. 뭔가 신이 났다. 풀 숲에 숨어있던 새들때문에 깜짝 놀라고 짝짓기 하는 사마귀 한 쌍을 보고 깜짝 놀랐다. 뱀의 허물을 보고는 조금 무섭기도 했다. 산은 정상에서의 풍경을 기대해라는 듯이 나에게 산이 가진 풍경을 살짝씩 보여주었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듯이 나는 얼른 정상에 도착하고 싶어졌다.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과 푸릇푸릇한 하늘아래에서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생명체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나는 정말 행복했다. 내가 사는 곳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하기까지 했다.

4시 5분. 입구에서 정상까지는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높지 않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장관이었다. 자전거길을 달리며 조각조각 기억에 남은 강의 이미지가 사실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굽이굽이 묵직하게 흐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산 뒤에 처음 보는 마을들이 있고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제법 크다고 생각했던 내가 사는 곳이 저렇게나 작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컸고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세상은 작아보이기도 했는데 손만 뻗으면 구름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았고 가볍게 폴짝 뛰면 저기 밑에 보이는 아파트 단지까지 단숨에 도착할 것 같기도 했다. 저렇게 작은 공동체 안에서 나름 나를 돌본다고는 했지만 어떤 날은 우울하고 어떤 날은 행복하고 어떤 날은 또 다시 절망에 빠지고 그랬었구나. 저 세상이 다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실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단순히 눈 앞에 보이는 풍경만으로 산은 나를 계속 붙잡았지만 어쩔 수 없이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해가 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길을 돌리다 다시 풍경을 바라보기를 수차례 결국 마음을 먹고 하산하는 발걸음을 땠다. 마음도 발걸음도 한층 가벼웠다. 내려갈 때의 풍경은 또 다른 느낌을 풍겼다. 나무 그림자가 제법 기울어져 있었지만 이따금 옅게 부는 바람 말고는 대기마저 조용한 날이었기에 희디 흰 뭉게구름은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이 산도 얼마나 이곳에 있었을까를 생각했다. 나를 만나기까지 이 산은 어떤 장면을 봤을까. 어떤 사람들을 맞이했을까. 내가 걸어간 이 길에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까? 어느새 내 그림자도 길어져 있었다.




4시 55분. 내려와서 올려다본 하늘에는 낮달이 떠 있었다. 등산 하는 내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지구에 착륙한 외계인이 된 기분이었다. 달을 보자마자 내 생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우주의 크기로 확장되었다. 청량한 푸른 하늘로 올라가면 하늘은 점점 검푸른 색으로 변하다 별과 달이 있는 캄캄한 곳으로 변하겠지.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도 없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나무와 풀도 없고, 상쾌한 가을도 없는 우주로 가게 되겠지. 나는 지구를 바라보며 등산을 하며 느꼈던 분위기를 잊지못한 채 지구라는 행성을 즐겨찾기목록에 추가하겠지. 그리고 한번씩 지구를 그리워할 것이고 한번씩 방문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고 있는 건... 참 그립다. 이 산을 더 천천히 올라갔더라면... 한번쯤은 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더라면... 주변을 잘 둘러보고 노란 꽃과 보라 꽃 말고 다른 색의 꽃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올라가면서 봤던 샛길 끝에는 어떤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확인했었더라면... 다시 이 산을 오르면 내가 놓쳤던 것을 다시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불확실함 속에서 바라게 되는 소망들... 모든 것은 끝이 났지만 오늘을 기분 좋게 회상할 것이라는 건 확실했다. 언제 붙었는지 모를 소매에 붙은 도둑가시를 하나씩 떼어내며 내리막길이 된 길을 터덜터덜 내려왔다.

6시 30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모든 것이 캄캄했다. 조명이 없는 들판의 밤은 이렇게 캄캄하구나 싶었다. 차소리도 들리지 않고 사람도 조명도 하나 없는 구간이 있었는데 나는 그 구간에서 갑자기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 구간은 마치 내 안의 세계에서는 제법 진지했던 걱정거리들이나 없어지지 않던 근심들이 하나도 없는 세계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 외로움보다는 이 세계 모든 부정적인 개념들이 사라져버린 세계라 오히려 잘됐다 싶은 기분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목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어떤 떨림이 느껴졌다. 나를 따라다니던 부정적인 기운을 때려눕혀버린 느낌이었다. 난 이 구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랬다.
익숙한 거리가 나오고 나는 달콤한 꿈에서 깬 듯 깨지 않기를 바랬고 깨버린 꿈을 잊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많이 아쉬웠다. 그렇다고 현실로 돌아온 사실이 밉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온 느낌같았다. 쉴새없이 초를 세는 타이머를 멈추고 리셋버튼을 누른 것 같은. 버튼을 누르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나는 조그마한 내 방에 갇혀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좋은 것이든 아니든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것은 내 몸을, 내 마음을 조종하기 시작했던것 같기도 하다. 이 상황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무의식에서는 그래서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도 했고 대부분 나와 타협을 하며 정당화를 하곤 했다. 지금은 뭐가 됐든 아무 상관 없는 것 같다. 그냥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은 책상이 있을 뿐이다. 그 위에 나는 어떤 것을 올려놓아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 방에 머물렀던 내 발걸음도 어디 있는지 모를 정상을 향해 가기 시작한 건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사실인지 허구인지 모를 어떤 사람들의 인생들이 적힌 책이 나를 위로했고 오늘은 베란다에서 고개만 내밀면 항상 같은 자리에 있었던 그 산이 나를 위로했다. 오늘 하루가 내 앞에 펼쳐진 많은 날들 중 많은 절망적일 날들을 구제해주었길 바란다.
다음에는 더 높은 산을 올라가야지. 올라가면서 후회될 일은 남기지 말아야지, 여기에는 어떤 풀이 있는지, 저기에는 어떤 색의 꽃이 있는지, 또 하늘은 얼마나 높은지, 어떤 돌멩이를 밟게 되는지, 내 소매에 붙은 도둑가시는 몇 개 인지, 저 샛길끝에는 어떤 세상이 보이는지, 다음에는 천천히 음미하면서 정상으로 올라가야지, 하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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